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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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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삼국시대 고성지역 분구묘 연구

목록
  • 저자 조신규
  • 시대
  • 학술지명
  • 페이지 900
  • 학위수여기관 창원대학교 대학원
  • 학위논문사항 사학과 2014. 8
  • 발행지역
  • 발행년도 2014

초록

3세기 후반 고성지역에 수용된 분구묘는 나주를 중심으로한 영산강유역에서 유입되었으며 그 배경으로 포상팔국의 전쟁과 보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간의 밀접한 관계를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은 동북아 연안항로상의 주요 거점에 위치하며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가운데 4세기 초 대 일본 교역의 변화를 계기로 포상팔국의 전쟁을 치루었으며 이과정 속에서 분구묘가 고성지역에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포상팔국 전쟁에서의 패전 결과 고성지역에서는 활발한 고분조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5세기 중반까지 저평한 분구를 가진 고분군이 조영된다. 5세기 후반이 되면 연안항로상 고성지역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는 가운데 재지화된 분구묘인 송학동형 분구묘가 축조된다. 송학동형 분구묘는 5세기 말부터 내산리고분군 지역으로 확장되고 연당리고분군 등 내륙지역에서도 일부 요소가 확인된다. 이와 함께 6세기 전반에는 구주계석실의 요소와 송학동형 분구묘 요소가 결합된 횡혈식석실분이 조영된다. 6세기 중반이 되면 매장주체부 규모가 작아지며 새로운 분구의 조영이 줄어든다. 송학동 1C호 석실에서는 대가야계 석실의 요소가 나타나며 유물에서도 대가야와 신라적 요소가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은 6세기 중반 영산강세력과 구주세력의 몰락으로 인한 고성 소가야의 약화와 대가야 및 신라의 영역확장이라는 정세변화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고성지역에서 더 이상 분구묘가 조영되지 않으며 신용리고분에서 신라계유물 일색으로 유물이 부장되는 것으로 보아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즈음하여 고성지역도 신라의 세력권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