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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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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5-6세기 大加耶의 成長과 文化的役活

목록
  • 저자 손지안
  • 시대
  • 학술지명
  • 페이지 911.0359 4
  • 학위수여기관 淑明女子大學校 敎育大學院
  • 학위논문사항 敎育大學院 歷史敎育 專攻 1992
  • 발행지역
  • 발행년도 1992

초록

加耶는 古代國家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기 때문에 자체의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여러 史書속에 흩어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加耶에 관한 說話가 있기는 하나 극히 미약하고 《日本書紀》에는 좀더 많은 기사가 존재하나 筆者에 의해 史料가 조작된 부분이 있어 그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볼 때 韓國考古學의 發展에 따라 1970년대 이후 발굴 조사된 많은 遺蹟·遺物들은 加耶史 硏究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高靈 池山洞古墳群·南原 月山里古墳群·東萊 福泉洞古墳群·義昌 다호리古墳群·陜川 옥적古墳群·金海 대성동古墳群 등에서 出土된 遺物들은 新羅나 百濟 文化圈 및 日本의 다른 遺蹟에서 출토된 것들과는 다른 獨自的인 性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加耶의 문화중심이 4세기 이전에는 金海를 비롯한 경남해안지대에 있었고 5세기 이후에는 高靈을 비롯한 경상내륙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考古學의 發掘이 진척됨에 따라 문헌자료의 부족에 직면하고 있던 加耶史 硏究에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었고 종래 한국고대상에 거의 부각되지 않았던 加耶史를 다른 삼국과 더불어 중요하게 취급함으로써 그 위치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도식적인 시기구분은 역사사실을 올바로 보는데 오류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여 加耶史의 時代區分에서는 한두가지 사건을 기점으로 삼지 않고 이미 3세기 초 漢四郡縣 쇠퇴와 사로세력권의 팽창으로 부터 시작되어 4세기 초반 한사군의 소멸과 高句麗 南征에 이르는 격동의 1세기간을 加耶史 前·後期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加耶史硏究에 있어서 자체 내에서의 變動期를 파악하고 그러한 일련의 변동기적 사건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對內外的인 상태와 그러한 사건들의 파급효과를 연속선상에서 이해한다면 加耶의 사회변화 및 발전과정을 일률적인 도식으로 파악하는데서 오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本稿에서는 첫째 大加耶勢力 登場以前의 前期加耶地域의 상태를 대내외적인 변동기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로 파악하여 살펴보았다. 즉 기원전후에 이르러 경남해안지역에 鐵器文化가 보급되면서 점진적인 사회통합이 진전되었다. 기원후∼2세기부터 弁辰小國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金海의 加耶國 (拘耶國 駕落國)은 그 중 하나였다. 3세기경에 弁韓 地域은 金海의 加耶國을 중심으로 열세개의 소국들이 통합되어 前期加耶勢力圈을 이루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그 주변지역인 馬韓·樂浪·倭 등과의 交易에 임하기도 하고 辰韓과의 세력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貝塚遺蹟의 범위와 《三國志》轉傳의 弁辰 12國 《三國遺事》의 五加耶등의 기록으로 보아 그 세력범위는 경남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낙동강유역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前期加耶地域內에서도 문화의 중심지는 경남해안지역이고 경상내륙산간지역은 후진지역으로 경남해안지역의 영향아래 서서히 문화축적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3세기 초 이후 漢四郡약화와 사로세력의 팽창 4세기초 漢四郡소멸등의 국제관계의 변화와 그로 인한 前期加耶勢力 내부의 파동으로 前期加耶勢力圈은 약화되기 시작하고 4세기말∼5세기초에는 新羅를 후원하는 高句麗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해 우선 金海를 중심으로 한 경남해안지역의 加耶중심세력이 해체되었고 新羅와 가까운 星州·梁山·東萊 등지의 加耶地域은 新羅勢力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加耶地域은 낙동강 서안으로 축소되었다. 둘째 前期加耶滅亡후 大加耶가 後期加耶小國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 대해 세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즉 경상내륙지방의 안정적인 농업생산기반 前期加耶 消滅 후 경상내륙지방으로 유입되는 경남해안의 선진문화 풍부한 鐵資源이 그것이다. 경상 내륙 산간 지장에는 무문토기시대 이후로 최상의 농경입지속에서 안정적으로 농업생산기반이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4세기 초 낙랑군 소멸이후 약화되어가던 전기가야 연맹의 경남해안 지역으로부터 4세기 전반∼5세기 초에 걸쳐 철기와 도기의 제작기술등 선진문화를 가진 유이민 집단이 경상내륙산간지역으로 직접 파급되어 온다. 그리고 이때부터 冶爐·三嘉·山陰등의 철자원 특히 冶爐의 풍부한 철자원을 소유하여 활발히 개발하기 시작한다. 셋째 前期加耶勢力圈이 거의 와해된 후에 다시 後期加耶勢力圈을 부흥시키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高靈 大加耶세력의 성장과정을 5세기말∼6세기초까지의 연대설정 안에서 살펴보았다. 5세기대에 들어 加耶내륙산간지역에서는 부흥의 기운이 일게 되고 5세기 후반에 伴跛國이 加耶의 재통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 高靈세력은 大加耶 始祖說話를 표방하면서 새로운 盟主로 등장하여 동일한 문화기반에서 성장하던 小國들을 포괄하는 後期加耶勢力圈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5세기말 加羅王의 이름으로 南齊에 사신을 보내 輔國將軍本國王이란 爵號를 받기도 하고 新羅 炤知王代에 高句麗의 新羅침입 때 독자적으로 援兵을 보낼 정도로 성장하였다. 6세기초 大加耶는 新羅·百濟의 국가성장과 팽창정책에 의해 양국에 병합되어 갈 운명에 처해있으면서도 百濟·新羅와 비교적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어 소백산맥과 낙동강 사이에 자기세력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넷째 이렇게 성장한 大加耶가 後期加耶圈內에서 수행하게 된 役割에 대해 살펴 보았다. 즉 建國說話의 내용분석으로 加耶圈內에서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고 考古學資料의 분석으로 高靈大加耶의 문화수준과 그를 중심으로 한 後期加耶 勢力圈의 문화권 설정 독특한 高靈 大加耶勢力 문물의 인근지역으로의 전파상황 영향력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高靈大加耶 세력의 築造임이 확실한 高靈池山洞 古墳群은 5세기초∼6세기초 石槨의 규모가 커지는 등 단계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현격한 계급격차도 추론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지배권력을 성립시키게 되고 그 독특한 개성을 지진 문물들을 인근 지역에 전파해 주고 자기 세력권내로 들어온 각지역의 首長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지역적 통합을 공고히 해 나갔으리라 추론하는 데 무리가 없다. 陜川·三嘉·山淸·咸陽·南原 등지의 高靈地域과 出土遺物의 유사성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러한 상태는 6세기 초까지 지속되는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文獻史料 분석과 考古學資料 분석을 통해 高靈大加耶 세력의 5세기말∼6세기초 단계의 문화수준상태와 세력확장정도·한반도남부 新羅·百濟지역과 倭와의 관계속에서의 대체능력들을 살펴본 결과 高靈 大加耶勢力은 경남해안중심의 前期加耶勢力와해 후 기왕의 세력기반을 발판으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해서 주변 옛 加耶地域을 최대한 통합하여 문화적 통합체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加耶史는 그동안 사학계에서 외면되어 왔으나 일부 고고학계에서는 너무 과장되기도 했다. 加耶史의 올바른 定立과 認識은 高句麗·百濟·新羅史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였던 것이다.

초록(영문)

In this thesis firstly the Former Gaya prior to Great-Gaya was studied. Namely in the BC and AD gradual social integration was made with distributing iron culture to Kyungnam Seaside Area. In the 3th century at Byunhan Area 13 small countries were integrated taking the lead by " Gaya-Country " of Kimhae and formed Former Gaya Power. Its power was ranged around Nakdong river centuring with Kyungnam Seaside Area. In the Former Gaya the cultural center was Kyungnam Seaside Area and Kyungsang inland was undeveloped area and accumlated culture under the influence of Kyungnam Seaside Area. However the Former Gaya weakend on account of Hansagun's being weak growing of Saro Power after the early 3C and international relationship change such as Hansagun's destruction and sequent crisis in the Former Gaya in the early 4C. From the end 4C to early 5C it was destroyed by an attack of Koguryo which supported Shila. And thus the Gaya Seaside in the Kyungnam Seaside Area was broken up and Gaya Area was reduced to Nakdong river west coast. Secondly the base of Great Gaya's growth after the Former Gaya's destruction was studied in the respect of three sides. Namely they are suitable agricultural production base of the Kyungsang Inland Area advanced culture of Kyungnam Seaside which introduced to Kyungsang Inland Area after the Former Gaya's destruction and destruction of abundant iron material. Thirdly growing course of the Koryung Great Gaya Power was studied which took main role in order to bring the Latter Gaya to prosperity after the Former Gaya's collasping. Entering into the 5C an emerge of restoration began to rise in the Gaya Inland Mountain Area and Banpa Country integrated the Gaya again in the latter 5C. This Koryung Power appeared with new leading power by advocating the Great Gaya's Founder Story and established the Latter Gaya Power by including small countries which were growing up on the same cuItural base. They dispatched an envoy to Namje by the name of Gara King and received the name of Bogukjanggunbongukwang in the end 5Cand grown up to a degree of sending reinforcements for themselves when Koguryo invaded Shila at Soji King period. In the early 6C the Great Gaya even though it was destined to integrated by Shila and Baekje because of the both countries'growth and expansion policy it established its own power between Sobaek Mountains and Nakdong river by extending its power relatively same with Baekje and Shila. Fourthly a role of the Great Gaya carried in the Latter Gaya boundary was studied. Namely we could see their effort to recover same quality tendancy in the Gaya boundary by analysis of the Foundation story and could understand Koryung Great Gaya's cultural level the Latter Gaya Power's cultural area establishment centuring with the cultural level spreading situation of special KorYung Great Gaya Power's civilization to the near area and powerfulness of influence by analysis of archeological specimens. We can see that old tombs developed gradually by becoming larger of stone outer coffin's scale in the early 5C-early 6C. And we can assume that they established strong government power as degree as inferring distinctive class difference spreaded their characterized civilization to the near area and established regional integration by distributing to the presidents who were under their power. Through analysis of these historical literatures and archeological specimens we can say that the Koryung Great Gaya Power after the Former Gaya Power's collasping centuring with Kyungnam Seaside Area developed sincerely based on existing power and integrated largestly near old Gaya Area and carried out a role by cultural political integration organization.

목차

목차 ◈ 간추린 글 I 머리말 = 1 II 大加耶 登場 이전 加耶의 情勢 = 6 III. 大加耶 成長의 經濟·文化的 基盤 = 17 IV. 大加耶의 成長 = 22 1. 獨自的인 對中國 外交 = 22 2. 獨自的인 對新羅 援兵 = 25 3. 百濟의 侵攻에 대한 積極的 對應 = 29 4. 築城을 통한 外侵 防禦 = 39 V. 大伽倻의 文化的 役割 = 47 1. 建國說話를 통한 加耶 내의 同質性 追求 = 47 2. 주변 小國으로의 文化 全破 = 51 VI. 맺음말 = 57 ◈ 參考文獻 = 62 ◈ ABSTRACT = 66